[지안기행] 창덕궁 길에서 백자를 만나다 | 김익영 도자예술
[지안기행] 창덕궁 길에서 백자를 만나다 | 김익영 도자예술
  • 박지안
  • 승인 2019.12.20 13: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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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후 남편과 함께 인사동에 들렸다. 지인을 뵙고, 시계를 보니 3시 반. 밥을 먹기도 집으로 바로 돌아가기도 애매한 시간이었다. 황금 같은 주말 오후를 헛되이 보내고 싶지 않은데. 어디로 향할지 고민하던 중 그가 이야기했다. "익영 선생님 공방에 가볼까?" 창덕궁 길에 위치한 선생님의 공방은 걸어서 10분 남짓한 거리에 있었다. 좋은 생각 같았다.

길만 건너 걸어왔을 뿐인데, 시끄러운 차 소리 대신 새소리가 들리는 골목이 나왔다. 복작 복작한 상업지역을 벗어나서 그런 것일까? 창덕궁 담벼락에 위치한 선생님의 공방은 언제 와도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선생님께서 반갑게 맞아주셨다. 오랜만에 들렸는데, 새로운 작품이 보였다. 옆이 길어지고, 굽이 높아진 백자 과반. 남편은 한참을 보다 이야기했다. "신작인가 봐요. 정말 멋지네요" 선생님께서는 소녀처럼 웃으시며 이야기하셨다. "아휴, 그걸 알아보았구먼".

작품은 작가를 닮는다 했던가. 작품도 선생님도 맑고 예뻤다. 백자임에도 불구하고, 살짝살짝 들어간 면치기 때문인지. 좀 더 날렵해지고 좁아진 기형 때문인지. 옛스러운데 모던하고 세련된 느낌이었다.

굽이 좁고 날렵해진 신작 백자과반
굽이 좁고 날렵해진 신작 백자과반

한참을 보는데, 외국인 가족이 들어왔다. 둘러보는 모습이, 단순히 지나가다 들어온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선생님에 대한 사전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알고 왔냐는 질문에, 남편분께서 이야길 했다. 보름 전 이 근방을 둘러보는데 작품들이 정말 예뻤다고. 한국을 떠나기 전, 가족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다시 들렸다고 했다. 이들은 연출가인 아내가 교환 교수로 있는 동안, 약 5개월가량 한국에서 머물렀는데, 곧 돌아갈 예정이라 했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 따뜻하게 대해준 고마운 사람들을 많이 만나, 그들에게 선물할 예쁜 기물을 사러 왔다고 했다.

소개를 보고 온 것도 아니고. 찾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신기했다. 좋은 작품을 알아보는 눈을 가진 것 같다고 말을 건네자, 아내분이 이야길 했다. 남편은 스페인 문화부에서 일을 해서, 이런 것들에 관심이 많다고. 아 어쩐지.

선생님의 기물을 한 아름 사 가는 분들을 보며, 생각했다. 이 자기들은 한국적이지만, 타국의 사람들까지 아름답다고 여길 보편성이 지니고 있구나.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과연 창덕궁 길에 이만큼 어울리는 가게가 있을까.

작품들이 진열된 선반
작품들이 진열된 선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 유홍준 선생님께서 "한국 도예의 자존심"이라고 이야기하는 김익영 선생님은 독특한 이력을 지니신 분이었다. 서울 공대에서 화학을 전공하며, 수치로 분석하는 법을 배우고. 알프레드에서 도자에 마음을 담는 법을 배우고. 또 한국에 돌아와 국립박물관에서 출토된 분청자를 분석하며, 우리 도자 맛을 깊이 알게 된 선생님. 한국적이면서도 세계적인 다양한 경험이. 분석적이면서도 감성적인 풍부한 경험이. 대영박물관까지도 그녀의 작품을 소장하게 만든 것은 아닐지.

이쯤 하면 되었을 것 같은데. 선생님은 아직도 뚜벅뚜벅 걸어가고 계셨다. 여든이 넘는 나이에 창덕궁 옆 작업실에 앉아, 어떻게 하면 좀 더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을지. 이리저리 그림을 그려보며 고민하고 계셨다. 나 같으면 벌써 진즉에 집에서 안 나왔을 텐데. 대가임에도 불구하고, 선생님께서는 매일의 자리를 지키며, 본인에게 주어진 하루를 소중히 가꾸고 계셨다.

신작을 위해 그리셨던 스케치
신작을 위해 그리셨던 스케치

평생 동안 우리 것을 연구하고 계승하시는 선생님이 어쩌면 이 창덕궁 길의 뿌리 같은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에 머물지 않고,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끊임없이 노력하시는 선생님. 멈춰 선 뿌리가 아니라, 깊이 더 깊이 뿌리를 내리는 선생님의 모습 덕분에 이 동네가 조금은 정겹게 느껴졌다. 나도 선생님처럼, 30대, 40대, 50대. 그리고 80이 넘는 날까지도. 삶의 순간들을 정성껏 빚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박지안]

공간을 만드는 사람들의 고민과 노력이 궁금했습니다. 그들을 탐험하는 지혜의 눈(智眼)을 가지고자, 지안기행을 기록해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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