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안기행] 2020년을 시작하며 | 젠제로
[지안기행] 2020년을 시작하며 | 젠제로
  • 박지안
  • 승인 2020.01.03 14: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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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의 마지막 날, 강남구청 인근에서 일을 마치고, 무얼 먹을까 두리번거렸다. 근처 맛있는 아이스크림 집이 있다던데. 가깝지만 낯선 이곳. 문득 동네 안이 궁금해졌다. 저 아파트 단지에는 어떤 가게들이 있을까? 그렇게 불쑥 안으로 들어갔다.

어, 이 가게들 여기 와 있었네? 내가 사는 동네에서 없어진 빵집과 쌀국수 집이 여기 옮겨와 있었다. 괜스레 반가웠다. 저 빵집 맛있었는데. 이 동네엔 은근 빵집도, 음식점도 많았다. 우리 동네보다, 젊은 층 비중이 높아서일까? 인근에 대형 마트나 백화점이 없기 때문일까? 커다란 구청, 세무서, 오피스가 수요를 받쳐주기 때문일까? 이유를 하나로 꼬집어 말하긴 어려워도, 이 동네에는 활기가 있었다. 요즘처럼 상가들의 공실이 많은 때에, 잘 되는 가게들의 비결이 궁금해졌다. 

서광 아파트를 찾아 더 걸어가니, 아이스크림 가게가 보였다. 저기가 젠제로구나. 메뉴판을 보니, 이것도. 저것도. 모두 다 맛을 보고 싶었다. 시그니처 메뉴가 무엇일지 고민하다 결국 여쭤보았다. 젠제로(생강)가 들어간 것이 대표 메뉴라고. "생강이 가진 풍부한 맛이 좋았고. 다른 재료와도 잘 어울리는 매력에 빠져, 가게 이름을 젠제로(생강) 라고 지었다."는 인터뷰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젠제로 외관
젠제로 외관

결국 '생강 쿠키'와 쌀이 들어간 '조선 향미'를 함께 주문했다. 아이스크림은 금방 나왔다. 생강 쿠키를 한입 떠먹으니, 온도와 촉감의 조화가 절묘했다. 차가운 실키함. 생강과우유가 만들어낸 고급진 맛. 섬세하고 우아한 맛이었다. 이 집, 좋은 재료를 사용하여 자체의 맛을 최대한 끌어내고 있었다. 함께 나온 쌀알이 쫀득하게 씹히는 조선 향미도 좋았다.

생강쿠키와 조선향미가 담긴 젤라또
생강쿠키와 조선향미가 담긴 젤라또

다른 메뉴도 맛보고 싶은 마음에, 남편을 불렀다. 추운데 멀리까지 오게 했다고, 툴툴거리는 남편. 일단 아이스크림 맛을 보라고 했다. '유자 소금 우유'와 '피스타치오 와사비'를시켰다. 주문할 때엔 당최 무슨 맛일지 상상이 안 되었는데. 한 입 먹은 남편은 눈을 똥그랗게 뜨며 말했다. "오 이것 맛있네. 진짜 유자야." 나도 한입 먹어보니, 정말 맛있었다. 유자의 향긋함과 산뜻함. 우유의 부드러움. 소금의 짭짤함이 어우러져 더 훌륭한 '맛'을 만들고 있었다. 잘 로스팅되어 고소한데, 와사비가 톡쏘는 매력을 주는 '피스타치오 와사비'도 좋았다. 

가격은 5천원(특별 메뉴 6천원)으로 조금 갸우뚱할 수 있어도. 들어간 재료를 생각하면 아깝지 않았다. 정성껏 좋은 재료를 손질하여 제대로 만든 젤라또였다. 서양의 재료와 우리 고유의 식재료를 적절하게 사용하고, 계절에 따라 조금씩 제철 재료로 바꾸며. 이곳에서만 먹을 수 있는 젤라또를 만들고 있었다.

젤라또 유행이 시작한 것은 한참 전이었는데. 그 사이 많은 가게들이 부침을 겪었다. 확장을 하며 초기의 맛을 잃어버린 곳도 있었고. 사라진 곳도 있었다. 아무래도 젤라또의 특성상 재료를 정성껏 손질하여, 매일매일 꾸준하게 정성껏 만들지 않으면 그 맛을 금세 잃어버리는 것 같았다. 2017년에 오픈한 이 가게는 손님들에게 사랑받으며 단단히 뿌리 내리고 있었다. 매장에서 먹는 손님들도 많았지만, 선물용으로 포장해가는 손님도 많고. 나이 드신 어르신도. 젊은 커플도. 다양한 연령대의 손님들이 오가고 있었다. 좋은 재료를 정성껏 손질해 최상의 젤라또를 매일 제공하겠다던 초심을 잃지 않고 있었다.

가게에 오기 전, 많은 신년 인사들이 오고 가는 속에서. 나는 어떠한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들었다.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꽃길만 걸으세요!" 하고 외쳤지만. 사실 마음속 깊숙한 곳에는 의문이 있었다. 내 짧은 인생길을 돌아보았을 때엔 꽃길만 걸은 적은 없었는데. 좋은 일도 있었지만, 골치 아픈 일들도 있었고. 꽃길보다는 풀숲을 헤치며, 걸어 나가야 했던 길들이 대부분이었다.

정성껏 만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새해를 맞이할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다. 내가 걷게 될 길이 비록 꽃길이 아닐지라도. 묵묵하게 매일의 과업에 충실하며 꽃길 만드는 사람들 중 한 명이 되면 좋겠다고. 정성껏 만든 아이스크림. 맛있게 구워낸 빵들이 이 동네를 정겹게 만들고, 꽃길이 되게 하듯. 나도 내게 맡겨진 일들에 집중하고.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정성을 쏟을 때. 내 주변이 점차 꽃길로 바뀌지 않을는지.

단단한 가게들이 많은 동네에서. 2019년 마지막 도심 속 여행을 마무리했다.

[박지안]

공간을 만드는 사람들의 고민과 노력이 궁금했습니다. 그들을 탐험하는 지혜의 눈(智眼)을 가지고자, 지안기행을 기록해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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